법정에서 ‘세상의 말들’을 알아듣는 사람들

탐색하다2024-03-29 05:00:06582

법정에서 ‘세상의 말들’을 알아듣는 사람들

[한겨레S] 정명원의 사건 외곽의 풍경들
국민참여재판
2008년 2월12일 대구지법에서 열린 우리나라 첫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들이 선서를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email protected]

16개의 눈동자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 나는 그 앞에 서서 무언가를 설명한다.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데 말은 점점 꼬이고 사람들의 표정은 읽히지 않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법복 안으로 식은땀이 배어드는데, 그럼에도 나는 하던 말을 멈출 수도, 그 자리를 벗어날 수도 없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해야 하는 형벌을 받은 사람처럼. 계속해서 그다음에 할 말을 생각하는 방식으로 머릿속의 톱니바퀴가 돌아간다. 그러다가 톱니바퀴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 잠에서 깨어난다.

이것은 내가 간혹 꾸는 악몽이다. 꿈속에서 나는 국민참여재판을 하고 있고 늘 곤경에 빠져 있다. 무의식 속에 잠재된 가장 두려운 것이 악몽으로 나타난다는데, 군대에 다시 가는 꿈이나 시험을 다시 치는 꿈을 꾼다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종종 국민참여재판을 하는 꿈을 꾼다.

간밤에 한동안 잊고 지낸 악몽을 다시 꾸었다. 오랜만에 국민참여재판을 하게 되어 내가 긴장했나? 그렇다고 하기엔 오늘의 재판 대상은 매우 평범하고 쉬운 사건이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재판이 진행되는 오늘까지 피고인이 다투고 있는 법률적 쟁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리가 되지 않는다는 정도?

10분이면 끝날 재판인데…
사건은 어느 한적한 어촌 마을의 방파제에서 벌어졌다. 가족들과 여행을 와서 이른 아침 홀로 방파제 위를 산책하던 피해자에게 낯선 남자가 느닷없이 각목을 들고 달려들었다. 피해자는 테트라포드 위를 뛰어내려 남자의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허리에 각목을 맞고 방파제 바닥에 넘어진다. 넘어지면서 바닥에 강하게 부딪힌 오른쪽 무릎 슬개골이 골절되어 전치 8주의 상해를 입었다. 그런 이유로 남자를 ‘위험한 물건인 각목을 이용하여 사람을 폭행함으로써 전치 8주의 상해를 입혔다’는 내용으로 처벌하자는 것이었다. 사안은 간명하고 증거는 명확했다.

그런데 피고인은 왜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을까? 통상의 재판으로 한다면 10분이면 끝날 일인데, 굳이 배심원들을 모셔다가 하루 온종일 해야 하는 재판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직업 법관이 아닌 일반 배심원에게 판단받아야 할 이렇다 할 쟁점도 승산의 지점도 없어 보이는 사건이어서, 오히려 재판 전략을 어디로 잡아야 할지 막막했다. 국민참여재판을 희망하는 이유에 대해 묻는 질문에 피고인은 이렇게 답했다.

“내가 등을 한 대 때린 건 맞아요. 근데…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가 담고 있는 피고인의 의사를 법률적 용어로 바꿔 이해하기 위해 법조인들은 잠시 골몰했다. 피고인의 입장이 폭행과 상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부인하는 것이냐는 재판장의 물음에 변호인은 그건 아니라고 했다. 피고인이 유죄는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뭐가 아니라는 거냐고 재판장이 피고인에게 다시 물었지만 피고인은 이전에 했던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유죄를 인정하는데 뭐가 아니라는 건지, 유죄를 인정하는 건 맞는 건지…. 피고인의 주장을 똑떨어지는 법률 용어로 정리하지 못해 찜찜한 상태로 재판이 시작되었다.

어쨌든, 입증 책임을 지고 있는 검사인 나는 유죄라는 증거를 하나씩 제시하는 쪽으로 재판의 방향을 잡았다. 피해자가 홀로 방파제 쪽으로 들어간 뒤 뒤따라 각목을 들고 들어가는 피고인의 모습이 찍힌 시시티브이(CCTV). 피고인이 유유히 방파제를 떠나는 모습, 얼마 뒤 출동한 119. 명확하게 골절이 확인되는 피해자의 무릎 시티(CT) 사진 등 유죄의 증거들은 충분했다. 끝으로 이 사건은 아무런 이유 없이 일면식도 없는 피해자를 공격한 ‘묻지마 폭행’으로 엄벌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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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이 ‘미친 사람’으로 몰아가자…
피고인의 입장을 정리하지 못해 좀 더 난감한 쪽은 변호인 같았다. 변호인은 그가 평소에도 이상행동을 보였고 망상에 사로잡히거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보였다는 피고인 가족들의 진술을 제시했다. 아마도 무죄 주장은 승산이 없다는 판단하에 심신미약에 초점을 맞춰 양형에서 감경을 받겠다는 전략인 듯 보였다. 사실상 피고인이 선택할 수 있는 법률상 가장 효과적인 변론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별다른 쟁점 없이 일찍 재판이 끝나겠다고 생각했던 순간 피고인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지금 내 변호사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나는 미친 사람이 아닙니다. 변호인을 교체해주십시오.”

재판장이 ‘피고인이 듣기에 좀 불편한 말일 수 있지만 변호인이 피고인을 위해 최선의 변론을 하고 계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피고인은 물러서지 않고 소리쳤다.

“나는 미친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그 순간 법정에는 ‘어이구, 가만히나 있지’ 하는 분위기와 ‘저런 정도의 상황 판단이라면 진짜 미친 사람은 아니지 않나’ 하는 분위기가 동시에 일었다. 잠시 휴정한 사이 변호인이 어떻게 피고인을 설득했는지, 재판은 변호인 교체 없이 다시 진행되었다. 변호인은 현저히 자신감을 잃은 표정이었으나 원래 준비해 온 방향대로 피고인 신문을 이어 갔다.

“피고인, 전 대통령의 따님인 ○○○씨하고 친구라고 하셨나요?”

“네, 며칠 전에도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피고인, 미국 항공우주국 나사(NASA)에서 일한 사실이 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곳에서 비밀 특수임무를 담당했습니다.”

피고인은 눈빛 가득 자신은 미친 사람이 아니라는 주장을 담아 배심원들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변호인이 던지는 질문을 덥석덥석 물었다. 그 불일치가 피고인의 망상적 상태를 더욱 강조해 보여주었다. 이것이 변호인의 고도의 전략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변호인이 저래도 되는 건가. 그나저나 이 사건에서는 피고인이 제정신이라고 하는 쪽이 유리한가, 아닌 쪽이 유리한가? 생각하면 할수록 대략 난감, 혼란한 재판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피고인의 반대편에 앉은 배심원들을 봤다. 그들은 불편한 기색 없이 진지하게 피고인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간간이 피고인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하기도 했는데, 최소한 배심원들은 처음부터 피고인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제야 법률가들이 법률 용어로 규정하지 못해 듣지 못했던 말들을 배심원들은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논리와 이치가 어긋난 듯 보이는 피고인의 말 너머로 정형화되지 못한 후회와 뻔뻔함과 억울함과 뉘우침, 그 스스로도 어쩌지 못하는 인생의 삐걱거림까지, 세상의 눈으로 보아야 알 수 있는 세상의 문법들이 법정으로 들어와 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번거롭고 더디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인데도 우리 형사법정의 어느 한 부분에서는 국민참여재판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누군가 묻는다면 이날의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법률 용어가 복잡하게 적힌 공판 서류 귀퉁이에 ‘배심원: 세상의 말들을 알아듣는 눈과 귀’라고 조그맣게 적었다.

대구지검 부장검사

대한민국 검찰청의 귀퉁이에서 이끼처럼 자생하던 18년차 검사 정명원이 지방 소도시에서 일하며 만난 세상과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본문 주소:http://www.colorandrhyme.com/news/575f59937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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