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복음이 필요한 땅

여가2024-03-29 10:39:0818327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복음이 필요한 땅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날씨나 일주일 예보를 꼭 확인합니다. 이번 주는 주로 흐리고 비 오는 날이 많네요. 햇빛 볼 날이 거의 없어서 좀 아쉽지만 그래도 봄을 재촉하는 날씨가 아닌가 싶습니다. 간절기인 만큼 날씨 변화가 무쌍하지요. 제 경험엔 4월에도 눈이 오는 날이 있었습니다. 아무튼 전보다 덜 추워졌다고 안심하지 마시고요. 한 주간도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속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이번 주엔 에릭 리델, 빌리 그레이엄, 순교자 폴리캅, 그리고 ‘메시아’의 작곡가 헨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중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올해 별세 6주기를 맞습니다. 그는 미국의 목사를 넘어 세계의 목사로서 복음을 전했던 사람, 수많은 대통령이나 정치 지도자를 만나 복음을 소개했던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레이엄 목사님은 다양한 지도자들을 만났지만 그 자신이 특정 정치색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각각 만난 것이었습니다.
BGEA 제공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6·25 발발 직후인 7월 14일, 그리고 김일성은 그로부터 42년 후인 1992년 4월 2일 만났습니다. 트루먼에게 김일성은 적이었습니다. 그레이엄 목사도 당시 트루만 대통령을 만나 공산주의의 공격에 대해 전력을 다해 대항해달라고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적의 수장에게 그레이엄 목사님은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성경과 자신의 책 ‘하나님과의 평화’를 선물합니다.

그레이엄 목사님은 94년에도 한 번 더 북한을 방문합니다. 도대체 왜 그는 북한을 방문했을까요. 당시 미국에서는 이런 그를 어리석은 목사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그가 오늘날 북한을 방문한다면 국내 극우 세력들은 그레이엄 목사를 ‘종북’이라며 낙인찍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비판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복음이 필요한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자서전’(두란노)에는 그가 북한에 가고 싶었던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나는 그곳을 위해 늘 기도해왔죠. 내가 사랑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나는 내가 미국 정부의 대표로 가는 것이 아니고 내 주요 관심은 정치가 아니라 신앙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메신저로 동토의 땅에 갔던 것입니다.

요즘 남북 관계가 어렵습니다. 미국인인 그레이엄 목사님 같은 분도 북한을 ‘내가 사랑하는 곳’이라고 표현했는데요. 우리는 얼마나 북한을 사랑하고 있을까요. 미국인보다 더 애틋하고 간절하게 통일을 위해, 그리고 복음의 메시지가 전해지길 위해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레이엄 목사님은 그의 자서전 서문에서 우리가 전할 메시지를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위해 하신 일 그리고 삶의 헌신을 통한 우리의 응답의 필요성에 그 핵심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찾는 자에게 용서와 새 생명과 희망을 주러 오셨다는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는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이 땅의 부흥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마침 2월은 미국 켄터키주 윌모어의 애즈버리대 부흥이 일어났던 달이기도 합니다. 바로 지난해 2월 8일이었습니다. 대학 예배당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자발적인 기도와 찬양이 24시간 연속으로 이어지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기도회는 미 전역과 세계 기독교인이 참여하는 자리로 확대됐습니다. 기도 모임엔 어떤 정치적 메시지도 없었습니다.

에릭 리델 선교사 이야기
1945년 2월 21일영화 ‘불의 전차’의 진짜 주인공인 스코틀랜드 올림픽 선수이자 중국 선교사였던 에릭 리델이 뇌종양으로 별세합니다. 그는 1942년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 체포돼 수감돼 있다가 석방 예정일 직전 사망했습니다. 한때 스코틀랜드 육상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돼 올림픽에서 주일 경기를 거부하면서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1925년 중국 톈진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이후 스코틀랜드로 이주해 육상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됐습니다. 그런데 1924년 파리올림픽에서 자신의 주 종목인 100m 예선전에 출전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주일에 경기가 열리는 게 거부 이유였습니다. 그는 “주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저는 그 법을 따를 뿐입니다”라고 말한 뒤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영국 언론은 분노했습니다.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 “조국을 버린 위선자”라는 비판적인 기사 제목이 지면을 장식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평일에 열린 400m 경기 출전권이었습니다. 하지만 100m 선수였던 그에게 400m는 벅찼습니다. 경기 관계자들도 리델을 들러리 정도로 여겼습니다.

출발선으로 들어서는 리델에게 팀의 물리치료사가 쪽지를 건넸습니다. 사무엘상 2장 30절 중 한 부분인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용기를 얻은 리델은 100m 트랙을 달리듯 전력 질주해 47.6초 만에 400m를 달렸습니다. 결과는 금메달이었습니다. 리델은 이후 200m 경기에도 출전해 동메달을 거머쥐었습니다. 주일에 예선을 치른 100m 출전을 신앙적 소신으로 거부하고 얻은 수확이었습니다.
리델의 신앙고백은 올림픽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는 영광을 뒤로한 채 자신이 태어난 중국 톈진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12년간 현지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이후 산둥반도의 농촌 마을로 들어가 중국인과 어울려 살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일본군이 침탈한 상황이었습니다.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추축국이던 일본은 중국 거주 연합국 출신 외국인을 모두 적으로 간주하고 수용소에 가뒀습니다. 리델도 이때 웨이신 수용소에 갇혔고 결국 거기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러나 리델은 수용소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쉬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쳤고 복음을 심었다고 합니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 목사
2018년 2월 21일20세기 가장 유명한 전도자였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99세로 별세했습니다. ‘미국의 목사’였던 그레이엄은 ‘세계의 목사’가 되어 전 세계를 돌며 ‘빌리 그레이엄 전도 집회’를 펼치는 등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했고 셀 수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레이엄은 또 역대 미국 대통령에게 조언을 제공했으며 미국 개신교와 그 밖의 종교에서 복음주의를 하나의 운동으로 확립하는 데 원동력을 제공했습니다.
국민일보 DB


“그레이엄의 신학은 ‘믿고 따르라’는 순종의 신학이다. 그 초석은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라고 하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 전기를 쓴 윌리엄 마틴(미국 라이스대) 교수는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그레이엄 목사의 확신은 그의 설교를 듣는 청중의 마음을 깊이 찌르는 강하고 날카로운 칼이었다고 언급했습니다.

성경에 대한 그의 강인한 믿음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요. 엄격한 장로교 집안 전통과 철저한 신앙교육에서 비롯됐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성경 교육을 철저히 시켰는데 아이들을 목욕시킬 때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시작하사~”로 시작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읊었다고 합니다. 벽에는 성경구절이 적힌 달력을 걸어놓고 외우게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경으로 철저하게 무장한 그의 신앙은 자연스럽게 설교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레이엄 목사의 메시지 특징은 짧고 강력한 것입니다. 다른 목회자와 달리 그는 설교문을 자세하게 작성했다고 합니다. 설교 제목도 ‘번쩍이는 보혈의 깃발 아래의 움직임’처럼 특이하게 붙였습니다.

그레이엄 목사가 복음주의권에서 본격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4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첫 대중 집회에서 설교를 하면서입니다. 이듬해 그는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BGEA)를 창립하고 영국 런던 전도대회(1954), 미국 뉴욕 전도대회(1957)를 거치면서 이른바 ‘현대 복음주의 리더’로 등극합니다.
BGEA 제공

이어 1960년부터 90년까지 30년간 이어진 부흥운동(4차 대각성운동)에는 그레이엄 목사가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는 부흥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람의 힘이나 장치로 얻어질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부흥회에서는 새로운 청중 동원 기법도 개발됐습니다. 소위 ‘안드레식 작전’으로 안드레가 그의 형제 베드로를 예수께 초대한 것(요 1:40~42)을 본 따 2명 이상 짝을 지어 친지나 친구를 집회에 데리고 오는 방식입니다.

그레이엄 목사는 평생 그를 따라 다닌 수식어 ‘복음 전도자’의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냉전시대에도 그는 정치색을 배제한 채 소련과 동독 등 공산권 국가를 넘나들며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특히 1952년과 73년, 84년 등 세 차례 한국을 찾은 건 한국 기독교사에 있어서 기념비적 사건으로 꼽을 만합니다. 92년과 94년엔 북한도 방문했습니다.
국민일보 DB

1973년 6월 3일 주일 오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목사 한국 전도대회는 엄청났습니다. 벽안(碧眼)의 목회자는 광장에 운집한 청중을 향해 혼신의 힘을 다해 외쳤습니다.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는 분들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일어서신 분들은 큰 소리로 따라 해 주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죄에서 돌아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겠습니다.”

50대 미국인 목사의 권면에 4만4000여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두 손을 모아 회개했습니다. 앞서 5월 16일부터 이어진 전도대회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명료하면서도 강렬한 그레이엄 목사의 설교는 뜨거운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레이엄 목사는 아내 루스 그레이엄(2007년 별세)을 평생의 동반자이자 사역 파트너로 대했습니다. 복음전파뿐 아니라 자녀 양육에도 뜻을 함께한 부부는 2남 3녀에게 신앙을 전수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그레이엄 여사는 중국 의료선교사였던 부모의 영향으로 1920년 중국에서 태어났습니다. 13세 때 평양의 기숙학교에 진학해 3년간 북한에서 학창시절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레이엄 목사는 아내를 ‘가장 신뢰할 만한 조언자’ ‘가장 친한 친구’로 불렀습니다.

아내와 자녀에게 애정을 보였던 그레이엄 목사였지만 185개국을 누비며 복음을 전한 그가 가족과 보낸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그는 집회로 집을 비울 때마다 숙소에 가족사진을 놓고 틈틈이 가족을 위해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동시에 유혹에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쾌활한 성품의 그레이엄 여사는 남편의 부재에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가정예배를 드리고 성경 암송을 지도하며 자녀를 살뜰히 돌봤습니다.

그레이엄 목사는 현장 집회뿐만 아니라 책으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대표적 저서로는 ‘내 소망은 구원입니다’ ‘인생’ ‘새로운 도전’ ‘빌리 그레이엄의 소망’ ‘천사, 하나님의 비밀 특사’ ‘예수의 십자가를 기억하라’ ‘기꺼이 거듭나는 삶’ 등 30여권이 있습니다.

순교자 폴리캅
155년 2월 23일(전통적인 날짜)서머나 주교 폴리캅이 순교했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로 알려진 그는 86세의 나이에 재판정에 섰습니다. 재판관은 그의 고령 나이를 생각해 로마 황제를 예배하라고 종용했습니다. 하지만 폴리캅은 “내가 86년간 그분을 섬겼으나 그분은 나에게 악을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저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응답했습니다.

재판관이 그를 산 채로 태워버리겠다고 위협하자 “재판관이 붙인 불은 순간적인 것이지만 지옥의 영원한 불은 꺼지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그는 결국 화형장으로 끌려갑니다. 폴리캅은 기도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주님께서 저를 이런 순간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심을 감사합니다.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전설에 따르면 불길은 그를 건드리지 못했고 그가 칼에 찔렸을 때 그 피가 불을 껐다고 합니다.

‘메시아’의 작곡가 헨델
1685년 2월 23일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이 태어났습니다. 헨델은 생애의 마지막 6년을 실명 상태로 보낸 후 1759년 사망했습니다.

J. S. 바흐와 같은 해 독일 할레에서 태어났습니다. 9살 때부터 오르간 연주자인 F. 차하우에게 사사해 작곡의 기초와 오르간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한때 할레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나 18세 때 함부르크의 오페라극장에 일자리를 얻어 이때부터 음악가가 되기로 합니다. 그러다 함부르크를 방문한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 공을 만납니다. 헨델의 연주를 듣고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할 것을 권유했고 1706년 헨델은 이탈리아로 향합니다.

뛰어난 건반 연주자 겸 작곡가로 두각을 나타냈던 헨델은 1709년 베네치아 무대에서 올린 오페라 ‘아그리피나’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이탈리아 활동의 절정을 맞이합니다. 다시 독일로 돌아온 그는 영국에서 활동하기로 합니다. 그의 명성이 이미 영국까지 퍼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1710년 런던으로 건너간 헨델은 오페라 작곡가로 명성을 쌓았고 영국 왕실의 총애를 받으면서 다양한 왕실 의전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1727년 영국 시민으로 정식 귀화했으며 영국인들은 그를 ‘국민 음악가’로 치켜세웠습니다. 1711년 초연된 그의 오페라 ‘리날도’는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이 오페라에 등장하는 유명한 아리아는 ‘울게 하소서’입니다. 1994년 영화 ‘파리넬리’로 유명해진 노래입니다.

1718년부터 1720년에는 찬도스 공작의 후원 아래 종교음악의 명작 ‘찬도스 앤섬’ 11곡을 작곡했습니다. 또 1719년에는 주로 이탈리아오페라의 상연을 위해 ‘왕립 음악아카데미’를 설립, 다른 두 이탈리아인 작곡가 G.B.보논치니, A.아리오스티와 함께 그 지배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약 10년 동안 창작력의 전성기에 들어선 그는 현재까지도 상연되고 있는 이탈리아오페라의 명작 ‘라다미스토’ ‘오토네’ ‘줄리어스 시저’ ‘타메를라노’ 등을 작곡했습니다. 또 1721년에는 초기의 명작 오라토리오 ‘에스테르’(Esther)를 작곡했으나 1728년부터 약 10년간은 이탈리아오페라 작곡가로서의 헨델의 위치는 점차 기울었습니다.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던 영국의 시민계급이 궁정적·귀족적인 취미를 배경으로 한 이탈리아오페라에 대해 반발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1728년 대사에 민요 선율을 곁들여 당시 귀족사회를 통렬히 풍자한 J. C. 페푸시의 ‘거지 오페라’가 성공을 거두자 왕실 음악아카데미는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어만 나오는 오페라가 영국인에겐 언어 장벽과 같았던 것도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헨델은 굴하지 않고 이듬해 아카데미를 재건, 헤이마게트극장을 근거로 한때 옛날의 인기를 되찾았으나 1733년 경쟁 상대인 보논치니의 이탈리아오페라와 또 다른 오페라 회사인 귀족오페라에 밀려 두 번째 극장을 폐쇄했습니다. 1734년 세 번째로 이탈리아오페라의 기치를 들고 코벤트 가든 오페라극장 경영에 나섰으나 3년 후인 1737년 마침내 건강 악화와 경영난으로 오페라 작곡가 겸 극장 경영자로서의 활동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헨델은 1732년부터 오라토리오를 작곡, 오늘날까지 예찬 되고 있는 ‘메시아’를 완성합니다. 오라토리오는 오페라처럼 특정한 스토리 라인을 따라 독창 중창 합창이 연주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비슷하지만, 무대 의상이나 소품, 비싼 무대 장치 등이 필요 없었고 일반 콘서트홀이나 교회 등 오케스트라와 성악가들이 모일 공간만 확보되면 어디든 공연이 가능한 것이 차이였습니다.

헨델은 가사를 영어로 쓰고 작품 소재 역시 기독교 신자라면(영국의 경우 성공회 신자라면) 친숙할 성경의 여러 에피소드를 채택하는 등 일반 영국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20편 이상의 오라토리오를 작곡했습니다. 1732년 ‘에스테르’ 개정판에 이어 1735년 사순절에는 성가작품을 포함한 15편의 오라토리오를 헤이마케트극장에서 연속 연주, 오라토리오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높였습니다. 1736년에는 ‘메시아’에 버금가는 유명한 오라토리오 ‘알렉산더의 향연’을 작곡하면서 1751년까지 대부분 작품을 오라토리오 작곡에 열중했습니다.

1739년 구약성서에 입각한 위대한 서사시적인 드라마 ‘사울’과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을 발표하면서 다시 건강을 회복한 그는 왕성한 창작력으로 1742년에는 고금의 명작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작곡했습니다. ‘메시아’는 모든 사람에게 기독교적 신앙의 정수를 순수하고도 감명 깊게 전해 주는 명작입니다. 그 형식도 달랐습니다. 메시아에서 가수들은 어떤 특정한 배역을 연기하지 않았습니다. 또 그 내용도 구세주 출현에 대한 구약 예언자들의 언급에서 시작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최후의 심판과 구원에 이르기까지 성경에서 뽑은 여러 구절에 기초해 재구성한 내러티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독창 가수들과 합창단은 이런 내용을 전달하는 매개체, 즉 악기로서의 역할에 충실합니다. 헨델은 훗날 메시아를 쓰던 시간을 회고하면서 “내 눈앞에 천국이 펼쳐지는 모습을, 그리고 위대한 주님을 직접 보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메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곡은 2부 말미에 등장하는 ‘할렐루야 합창’입니다. 이 합창은 헨델 음악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선율로 전 세계인의 귀에 익숙한 클래식의 대표곡입니다. 당시 공연을 보러온 조지 2세를 비롯한 관객들은 모두 기립해 합창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도 할렐루야 합창에서는 관객이 모두 일어서서 듣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헨델의 수많은 오라토리오 중에서 주로 서정적 요소를 강조하며 접속하는 칸타타 형태를 취한 이 작품은 오히려 예외적 작품에 속합니다. 그의 오라토리오의 본질은 현실 무대의 제약을 벗어난 가상적 무대에서 기독교적 신앙을 모체로 하는 보편적이며 윤리적인 관념을 전개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종교적 감동을 주는 서정적 표현에 뛰어났고 오페라 작품 속에 축적한 선명한 이미지를 환기시켜 이를 드라마틱하게 구사하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알려집니다.

헨델은 메시아 이후에도 그는 ‘삼손’ ‘벨샤자르’ 등 뛰어난 오라토리오를 많이 작곡했으며 1751년 오라토리오 ‘입다’(Jephtha)를 작곡하던 중 시력을 잃었습니다. 헨델은 오페라(46곡), 오라토리오(32곡) 등 주로 대규모의 극음악 작곡에 주력했지만 기악 방면에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특히 유명한 관현악곡 모음곡인 ‘수상의 음악’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 등은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그는 사후 최고 영예인 웨스트민스터대성당에 매장됐습니다.

[참고 서적]
<원전을 곁들인 맛있는 인문학 클래식 브런치> 정시몬 지음, 부키
<빌리 그레이엄 자서전> 빌리 그레이엄 지음, 두란노
<초대 교회사> 후스토 곤잘레스 지음, 엄성옥 옮김, 은성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62946&cid=40942&categoryId=34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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